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잘못된 길 (문단 편집) == 관련 문헌 == 먼저 나애리(2004)의 문헌은[* 나애리 (2004). 1990년대 프랑스의 새로운 페미니즘에 대한 연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12, 1-20.] 본서가 저술된 직후에 번역을 하기 전에 미리 국내에 소개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맞춤법이나 아웃풋 스타일, 규격 등에서 상당히 엉성하긴 하지만(…) 본서에서 소개하는 설문조사 문항들이나 본서에서 문제삼고 있는 새로운 성범죄 방지법 등을 [[프랑스어]] 원문과 함께 소개하고 있으므로, 그런 디테일한 정보가 추가로 필요하다면 참고할 만한 문헌이 되겠다. 방금희(2006)의 경우[* 방금희. (2006). 학문적 글쓰기와 페미니즘 수사학. 아시아여성연구, 45(2), 241-269.] 모순형용과 변형성 등의 "낯설게 하기" 라는 페미니즘의 수사법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바댕테르가 비판했던 90년대 페미니즘의 "아말감" 전략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즉, 페미니즘이 "개인적인 성생활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이다" 라면서 수사적으로 익숙한 무언가를 낯설게 할 때, 그것은 본질적으로 안정적인 것을 뒤흔들고 전복시켜서 유동적이게 하려는 성질을 갖지만, 90년대 페미니즘이 "모든 남성은 전부 가해자다" 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안정적인 것을 더욱 고정시키는 성질'''을 갖는다는 것이다. 방금희(2006)는 이것이 "페미니즘의 왜곡을 이끄는 [[안티페미니즘|반페미니즘]]"(p.258)이라고 경계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이현주(2017) 역시[* 이현주. (2017). 강남역 살인, 흉악범죄, 페미니즘. 마르크스21, 20, 12-27.]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 이후로 여성이 겪는 위험과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서 구태여 선정적으로 강간 피해를 과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본서를 거론하고 있다. 여기서도 여성들에게 "불필요한 위축감과 무력감을 주고, 여성 차별의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게 되기 십상"(p.21)이라면서 [[페미사이드]](femicide)를 주장하는 [[정희진]] 등의 입장을 비판한다. 여기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자의식과 사회적 진출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자들을 여전히 손쉬운 착취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있다. 즉, 남성의 폭력적인 권력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착취와 부의 축적'''이 여성 노동자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단결과 조직화가 필요하지, 여성을 광범위하게 피해자로 취급하는 것은 "남성 개개인을 고발하는 데 주력하도록 만들어"(p.25) 실제 구조적 모순과 '진짜 지배자와 기득권층' 의 존재를 가리게 한다는 것이다. 국내에 《일베의 사상》 의 출간으로 인해 유명세를 얻고 있는 시사평론가인 [[박가분(평론가)|박가분]]의 경우 《[[포비아 페미니즘]]》 에서 논리를 전개할 때 본서를 즐겨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본서가 90년대 프랑스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흐르며 남성을 악마화하는 피해자 서사에 매몰되고 다양한 사회적 퇴보를 일으킨다고 비판한다면, 해당 도서는 그런 피해자 서사를 통해 [[공포]](phobia)가 재생산됨으로써 '''페미니즘의 독선적인 폭주'''가 야기되고, [[진보]]진영은 이를 마땅히 막아야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로 인해 '''적절히 제동을 걸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소모되는 남자]]》 와 함께, 해당 도서에서 큰 지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도서라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